신호등 불, 왜 꺼졌나
[녹색정치 리포트] 2025 독일 총선(1) '신호등 연정' 붕괴 원인은?
녹색정치연구소는 2025년 2월 23일(현지시간)에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 관한 리포트를 발간합니다. 1회에서는 조기 총선의 배경이 된 ‘신호등 연정’의 붕괴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2회에서는 선거 결과와 전망을 제시하며, 3회에서는 녹색당과 좌파당의 정치 전략에 관해 분석합니다.
2023년 11월 15일, 붕괴의 서막
2021년 12월 8일(이하 현지시간)에 출범했던 ‘신호등 연정(Ampelkoalition)’1은 전통적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사민당), 생태주의 신좌파 성향의 녹색당, 친기업·보수 성향의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연합한 정부였다. 이들의 정치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상호 보완적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연정은 출범 직후 이례적인 합의를 발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책정했으나 사용하지 않은 600억 유로(당시 기준 한화 약 86조원)를, 기후 및 변환 기금(KTF; Klima- und Transformationsfondsgesetz)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 신호등 연정 출범 당시 대표들. 왼쪽부터 크리스티안 린트너 자민당 대표, 올라프 숄츠 사민당 대표, 안날레나 베어보크와 로베르트 하베크 녹색당 공동대표. 사진=Michael Kappeler/dpa/picture alliance, spiegel.de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독일 정부가 2009년부터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를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기로 한 ‘부채 브레이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6년 장기 집권에서 물러나 제1야당이 된 기독교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기민련/기사련)2은 즉각 반발하여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이런 식의 관행이 허용되면 정부는 무제한으로 부채를 쌓고, 무분별하게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23년 11월 15일, 독일 헌법재판소는 위와 같은 예산 전용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국가적 혼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파행적인 예산 운영에 제동을 건 것이다. 예산에 큰 구멍이 생기자 연정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연정에 필수인 파트너십마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1년 간 연정은 좌충우돌했고, 연정의 참여자들은 ‘연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연정 붕괴 한 달 전인 2023년 10월은 이들의 파트너십 붕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올라프 숄츠 총리(사민당)는 주요 기업인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불러 산업 정상회의를 열었는데 로베르트 하베크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녹색당)과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부 장관(자민당)을 배제시켰다. 이들이 경제분야의 주요 내각 구성원이자 연정에 참여한 각 정당의 수장들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날 린트너는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회의를 하면서 총리에게 집중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갔다.
한편 하베크은 별도로 기업의 투자 촉진을 위해 10억 유로 규모의 부채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자민당은 즉각 합의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고, 하베크은 재차 필요성을 제기했다. 언론은 연정의 3인방인 숄츠, 하베크, 린트너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단결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다는 점을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 위태로운 신호등 연정의 3인방. 오른쪽부터 올라프 숄츠 총리(사민당) 로베르트 하베크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녹색당),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자유민주당)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자민당). 사진=tagesschau.de에서 재인용.
결국 자민당이 먼저 선을 넘었다. 2024년 11월 1일 린트너는 18쪽 분량의 <독일의 경제 회복 - 성장과 세대 간 정의를 위한 개념>이란 보고서를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연대추가세의 폐지와 법인세 인하 등 기업과 고소득자을 위한 광범위한 세금 감면, 기후보호 목표 폐기와 복지 축소 등을 담은 이 문서는 마치 자민당의 선거용 정책 공약서와 같았다. 하지만 2021년에 지난한 협상 과정을 통해 꼼꼼하게 작성된 연정 합의문인 '더 많은 진보를 위한 담대한 도전(Mehr Fortschritt wagen)'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행태를 받아들일 수도, 묵과할 수도 없었던 사민당과 녹색당은 린트너의 행동을 비판했다.
2024년 11월 6일, 숄츠와 린트너, 그리고 나중에 하베크까지 참여하는 연정 수뇌부 회동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하베크는 이견이 있는 부분에 어느 정도 양보 의사를 내비쳤지만, 린트너가 완강한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뇌부 회동은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회동이 끝난 뒤 숄츠는 대통령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에게 린트너를 재무장관에서 해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호등 연정 붕괴! 위태롭게 깜박이던 신호등 불이 꺼진 순간이었다.
자민당은 왜? ‘디데이보고서’ 파문
연정 붕괴 후, 숄츠는 린트너를 향해 너무 이기적이었고 신뢰를 깨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린트너는 숄츠가 이미 여름부터 자신을 해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연정이 깨진 것은 숄츠의 ‘계산된 붕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베크는 연합이 실패한 것에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상호 비방이 이어지던 2024년 11월 15일, 독일 언론은 자민당이 약 2주 전부터 연정을 깨기 위한 내부 회의를 했다면서 8쪽 분량의 "디 데이 시나리오와 대책(D-Day Ablaufszenarien und Maßnahmen)"이라는 보고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거기에는 연정을 종료하는 시점과 다가오는 미국 대선·녹색당 전당대회·예산 마감일 등을 고려한 시나리오 등이 담겨 있었다.
특히 연정 붕괴에 기점이 됐던 린트너의 경제보고서는 ‘어뢰’로, 어뢰를 발사하는 날인 보고서 발표일은 ‘디 데이’로, 이후 펼쳐질 선거운동은 ‘전투’로 묘사된 것으로 알려졌는다. ‘디 데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보고서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정치 영역에서 이러한 군사 용어들을 사용한 것 때문에 독일 사회에서 더 큰 비판이 일었다.
사민당 측에서는 즉각 이를 정치적 사기로 규정하고 자민당을 향해 정치세력으로서 자격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녹색당도 정치를 게임이나 연극처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연정을 탈퇴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고려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었다.
린트너를 비롯한 자민당 지도부는 보고서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독일 정계에서는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자민당이 새로운 연정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기민련/기사련에서도 린트너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일어났고, 자신들이 자민당과 정책적으로도 가깝지 않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자민당은 도대체 왜 이런 행위를 벌인 것일까? 정치 행위자들이 합리적 의사결정, 즉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결국 얻지 못했지만 얻으려 했던 것이 대체 무엇일까?
독일 언론은 신호등 연정이 사회정책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으나 예산 문제, 즉 돈 문제에 관해서는 파행적이었다는 평가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공공투자를 늘리고 환경 보호에 나서려던 사민당·녹색당과, 정부의 예산 규모를 줄이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려던 자민당의 갈등 구도로 표출됐다. 연정을 운영하면서 자민당은 사민당과 녹색당 사이에서 사실상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좌충우돌하는 연정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지만 유독 자민당에는 치명적이었다. 사민당과 녹색당도 지지율 하락에 고심했지만, 자민당은 5~6% 선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며 유일하게 원내 재진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자민당으로서는 이러한 추세로 연정이 지속되는 것보다는 연장을 깬 뒤, 기민련/기사련이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친기업적 정체성을 드러내 지지층을 결집해 원내에 살아남은 뒤 전통적인 ‘흑황 연정’3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생존책이라고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때때로 무리한 상황은 무리한 결정으로, 그리고 또 무리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된다. 신호등 연합이 붕괴한 직후, 여론조사 기관인 인프라테스트 디맵(infratest-dimap)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0%가 연정 붕괴의 책임이 자민당에 있다고 응답했고, 26%는 녹색당, 19%는 사민당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디 데이 보고서’가 폭로되면서 자민당은 그들 말로 ‘전투’, 즉 선거운동을 매우 힘겹게 진행해야 했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2013년 선거에 이어 다시 원외 정당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3년 전 선거 결과를 “역사적 승리”로 표현했던 린트너는 이번 선거가 끝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숄츠 총리 불신임과 조기 총선의 도래
2024년 11월 7일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린트너를 재무장관에서 해임했다. 숄츠가 해임을 요청한지 이틀만이다. 독일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총리가 요청하면 연방 장관에서 해임해야 한다. 이에 따라 자민당 소속 장관들이 추가로 사임하면서 신호등 연정이 붕괴했다. 정부는 사민당과 녹색당의 소수 연정으로 남게 됐다.
숄츠는 2025년 1월에 신임 투표를 하고 불신임됐을 경우 3월 중에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기민련/기사련은 일정을 앞당기라고 압박했다. 결국 2024년 12월 16일 숄츠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가 열렸는데 찬성 207표, 반대 394표, 기권 116표, 불참 16표로 불신임되었다.
숄츠는 사민당 소속 의원들로부터는 압도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재신임을 받았지만, 최후의 파트너였던 녹색당마저 참석 의원 전원이 기권하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의외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소속 의원 3명으로부터는 신임을 받는 촌극이 벌어졌다. 숄츠가 불신임됨에 따라, 조기 총선 일자는 2025년 2월 23일로 정해졌다.

▲ 2024년 12월 16일 올라프 숄츠 총리의 신임 동의안 투표 결과4
통치하려면 연합하라
위태로운 신호등 연정을 향해서 독일 언론은 “서로 대적하며 통치할 바에 통치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비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통치하지 않는 것보다 통치하는 것이 나으며, 통치를 하려면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독일의 정당제도는 건전한 연합정치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68혁명 이후의 재구성된 시민성과, 민심을 최대한 반영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제도의 결합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합정치의 행위자가 둘에서 셋으로 늘어난 신호등 연정은 연합하지 못했고, 하베크의 표현대로 ‘매우 짜증날’만큼 나쁜 평판을 얻고 실패하고 말았다.
2025년 독일 총선에서 정권은 잡은 것은 기민련/기사련이다. 하지만 ‘역사적 승리’를 거둔 것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었다, 사민당은 전통적 양대정당이라는 것이 무색할만큼 최악의 패배를 얻었다. 녹색당은 지난 총선에 비해서 후퇴했지만 역대 두번째로 많은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극우에 맞서 자기의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은, 총선 직전까지 원내 진출이 불투명했던 좌파당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2025년 독일 총선의 결과와 전망을 살펴본다. ●
- 의견 및 문의: greenpolitics.kr@gmail.com
- 각 정당의 상징색, 즉 사민당의 빨간색, 자민당의 노란색, 녹색당의 녹색이 신호등을 떠올리게 해 붙여진 이름이다.
- 기민련과 기사련은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기민련은 바이에른 주에 지부를 두지 않고, 기사련은 바이에른에서만 활동하며, 연방의회에서 함께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독일에서는 두 정당을 합쳐 ‘우니온(Un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 각 정당의 상징색, 즉 기민련/기사련의 검정색, 자민당의 노란색을 표현한 것이다.
- https://www.bundestag.de/parlament/plenum/abstimmung/abstimmung?id=938 (접속일: 2025.03.13.)
신호등 불, 왜 꺼졌나
[녹색정치 리포트] 2025 독일 총선(1) '신호등 연정' 붕괴 원인은?
녹색정치연구소는 2025년 2월 23일(현지시간)에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 관한 리포트를 발간합니다. 1회에서는 조기 총선의 배경이 된 ‘신호등 연정’의 붕괴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2회에서는 선거 결과와 전망을 제시하며, 3회에서는 녹색당과 좌파당의 정치 전략에 관해 분석합니다.
2023년 11월 15일, 붕괴의 서막
2021년 12월 8일(이하 현지시간)에 출범했던 ‘신호등 연정(Ampelkoalition)’1은 전통적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사민당), 생태주의 신좌파 성향의 녹색당, 친기업·보수 성향의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연합한 정부였다. 이들의 정치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상호 보완적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연정은 출범 직후 이례적인 합의를 발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책정했으나 사용하지 않은 600억 유로(당시 기준 한화 약 86조원)를, 기후 및 변환 기금(KTF; Klima- und Transformationsfondsgesetz)으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독일 정부가 2009년부터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를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기로 한 ‘부채 브레이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6년 장기 집권에서 물러나 제1야당이 된 기독교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기민련/기사련)2은 즉각 반발하여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이런 식의 관행이 허용되면 정부는 무제한으로 부채를 쌓고, 무분별하게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23년 11월 15일, 독일 헌법재판소는 위와 같은 예산 전용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국가적 혼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파행적인 예산 운영에 제동을 건 것이다. 예산에 큰 구멍이 생기자 연정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연정에 필수인 파트너십마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1년 간 연정은 좌충우돌했고, 연정의 참여자들은 ‘연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연정 붕괴 한 달 전인 2023년 10월은 이들의 파트너십 붕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올라프 숄츠 총리(사민당)는 주요 기업인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불러 산업 정상회의를 열었는데 로베르트 하베크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녹색당)과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부 장관(자민당)을 배제시켰다. 이들이 경제분야의 주요 내각 구성원이자 연정에 참여한 각 정당의 수장들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날 린트너는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회의를 하면서 총리에게 집중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갔다.
한편 하베크은 별도로 기업의 투자 촉진을 위해 10억 유로 규모의 부채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자민당은 즉각 합의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고, 하베크은 재차 필요성을 제기했다. 언론은 연정의 3인방인 숄츠, 하베크, 린트너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단결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다는 점을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자민당이 먼저 선을 넘었다. 2024년 11월 1일 린트너는 18쪽 분량의 <독일의 경제 회복 - 성장과 세대 간 정의를 위한 개념>이란 보고서를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연대추가세의 폐지와 법인세 인하 등 기업과 고소득자을 위한 광범위한 세금 감면, 기후보호 목표 폐기와 복지 축소 등을 담은 이 문서는 마치 자민당의 선거용 정책 공약서와 같았다. 하지만 2021년에 지난한 협상 과정을 통해 꼼꼼하게 작성된 연정 합의문인 '더 많은 진보를 위한 담대한 도전(Mehr Fortschritt wagen)'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행태를 받아들일 수도, 묵과할 수도 없었던 사민당과 녹색당은 린트너의 행동을 비판했다.
2024년 11월 6일, 숄츠와 린트너, 그리고 나중에 하베크까지 참여하는 연정 수뇌부 회동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하베크는 이견이 있는 부분에 어느 정도 양보 의사를 내비쳤지만, 린트너가 완강한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뇌부 회동은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회동이 끝난 뒤 숄츠는 대통령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에게 린트너를 재무장관에서 해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호등 연정 붕괴! 위태롭게 깜박이던 신호등 불이 꺼진 순간이었다.
자민당은 왜? ‘디데이보고서’ 파문
연정 붕괴 후, 숄츠는 린트너를 향해 너무 이기적이었고 신뢰를 깨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린트너는 숄츠가 이미 여름부터 자신을 해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연정이 깨진 것은 숄츠의 ‘계산된 붕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베크는 연합이 실패한 것에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상호 비방이 이어지던 2024년 11월 15일, 독일 언론은 자민당이 약 2주 전부터 연정을 깨기 위한 내부 회의를 했다면서 8쪽 분량의 "디 데이 시나리오와 대책(D-Day Ablaufszenarien und Maßnahmen)"이라는 보고서의 존재를 폭로했다. 거기에는 연정을 종료하는 시점과 다가오는 미국 대선·녹색당 전당대회·예산 마감일 등을 고려한 시나리오 등이 담겨 있었다.
특히 연정 붕괴에 기점이 됐던 린트너의 경제보고서는 ‘어뢰’로, 어뢰를 발사하는 날인 보고서 발표일은 ‘디 데이’로, 이후 펼쳐질 선거운동은 ‘전투’로 묘사된 것으로 알려졌는다. ‘디 데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보고서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정치 영역에서 이러한 군사 용어들을 사용한 것 때문에 독일 사회에서 더 큰 비판이 일었다.
사민당 측에서는 즉각 이를 정치적 사기로 규정하고 자민당을 향해 정치세력으로서 자격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녹색당도 정치를 게임이나 연극처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연정을 탈퇴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고려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었다.
린트너를 비롯한 자민당 지도부는 보고서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독일 정계에서는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자민당이 새로운 연정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기민련/기사련에서도 린트너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일어났고, 자신들이 자민당과 정책적으로도 가깝지 않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자민당은 도대체 왜 이런 행위를 벌인 것일까? 정치 행위자들이 합리적 의사결정, 즉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결국 얻지 못했지만 얻으려 했던 것이 대체 무엇일까?
독일 언론은 신호등 연정이 사회정책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으나 예산 문제, 즉 돈 문제에 관해서는 파행적이었다는 평가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공공투자를 늘리고 환경 보호에 나서려던 사민당·녹색당과, 정부의 예산 규모를 줄이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려던 자민당의 갈등 구도로 표출됐다. 연정을 운영하면서 자민당은 사민당과 녹색당 사이에서 사실상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좌충우돌하는 연정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지만 유독 자민당에는 치명적이었다. 사민당과 녹색당도 지지율 하락에 고심했지만, 자민당은 5~6% 선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며 유일하게 원내 재진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자민당으로서는 이러한 추세로 연정이 지속되는 것보다는 연장을 깬 뒤, 기민련/기사련이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친기업적 정체성을 드러내 지지층을 결집해 원내에 살아남은 뒤 전통적인 ‘흑황 연정’3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생존책이라고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때때로 무리한 상황은 무리한 결정으로, 그리고 또 무리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된다. 신호등 연합이 붕괴한 직후, 여론조사 기관인 인프라테스트 디맵(infratest-dimap)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0%가 연정 붕괴의 책임이 자민당에 있다고 응답했고, 26%는 녹색당, 19%는 사민당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디 데이 보고서’가 폭로되면서 자민당은 그들 말로 ‘전투’, 즉 선거운동을 매우 힘겹게 진행해야 했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2013년 선거에 이어 다시 원외 정당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3년 전 선거 결과를 “역사적 승리”로 표현했던 린트너는 이번 선거가 끝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숄츠 총리 불신임과 조기 총선의 도래
2024년 11월 7일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린트너를 재무장관에서 해임했다. 숄츠가 해임을 요청한지 이틀만이다. 독일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총리가 요청하면 연방 장관에서 해임해야 한다. 이에 따라 자민당 소속 장관들이 추가로 사임하면서 신호등 연정이 붕괴했다. 정부는 사민당과 녹색당의 소수 연정으로 남게 됐다.
숄츠는 2025년 1월에 신임 투표를 하고 불신임됐을 경우 3월 중에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기민련/기사련은 일정을 앞당기라고 압박했다. 결국 2024년 12월 16일 숄츠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가 열렸는데 찬성 207표, 반대 394표, 기권 116표, 불참 16표로 불신임되었다.
숄츠는 사민당 소속 의원들로부터는 압도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재신임을 받았지만, 최후의 파트너였던 녹색당마저 참석 의원 전원이 기권하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의외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소속 의원 3명으로부터는 신임을 받는 촌극이 벌어졌다. 숄츠가 불신임됨에 따라, 조기 총선 일자는 2025년 2월 23일로 정해졌다.
▲ 2024년 12월 16일 올라프 숄츠 총리의 신임 동의안 투표 결과4
통치하려면 연합하라
위태로운 신호등 연정을 향해서 독일 언론은 “서로 대적하며 통치할 바에 통치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비판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통치하지 않는 것보다 통치하는 것이 나으며, 통치를 하려면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독일의 정당제도는 건전한 연합정치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68혁명 이후의 재구성된 시민성과, 민심을 최대한 반영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제도의 결합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합정치의 행위자가 둘에서 셋으로 늘어난 신호등 연정은 연합하지 못했고, 하베크의 표현대로 ‘매우 짜증날’만큼 나쁜 평판을 얻고 실패하고 말았다.
2025년 독일 총선에서 정권은 잡은 것은 기민련/기사련이다. 하지만 ‘역사적 승리’를 거둔 것은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었다, 사민당은 전통적 양대정당이라는 것이 무색할만큼 최악의 패배를 얻었다. 녹색당은 지난 총선에 비해서 후퇴했지만 역대 두번째로 많은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극우에 맞서 자기의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은, 총선 직전까지 원내 진출이 불투명했던 좌파당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2025년 독일 총선의 결과와 전망을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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